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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중인 철학자 고병권씨의 모습 ⓒ 월간 옥이네 인간이 자신이 딛고 선 토대와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은 좀처럼 자기 생각을 바꾸기 어렵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는 일은 두렵고, 자신이 속한 자리를 돌아보는 건 더더욱 어렵다야마토3 . 지금의 자리, 지금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의 이익을 거슬러, 자신이 속한 계급과 질서의 바깥을 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렵고 불편한 응시에서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변화는 단지 외부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고 그 세계 바깥의 존재를 받아들이릴게임매장 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한 인간이 전혀 다른 삶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사유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자, 자신이 살아온 삶의 전제를 다시 묻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게 되는가. 전혀 다른 삶의 현실과 마주하며 낯선 이들의 삶을 응시하게 되는 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회사채 가.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전환은 어떻게 시대를 흔드는 사유로 이어질 수 있는가. 19세기 유럽,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 가문의 딸과 결혼한 젊은 지식인이 있다. 안락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던 그는,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담장 너머를 바라본다. 그가 목격한 것은 굶주린 얼굴과 절망의 표정, 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처벌하는 와이비로드 주식 현실. 금세 여기에 시선을 빼앗긴 그는 곧 그 세계를 책으로 써낸다. 바로 <자본>(Das Kapital). 그의 이름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다. 왜 그는 자신의 배경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무력한 삶에 그토록 깊이 눈길을 줬을까.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겪으며 전혀 다른 삶의 물음을 품게 됐을까. 그 여정을 따라바나나게임 가다 보면, 한 인간의 내면이 '혁명'적으로 열리는 과정을 마주하게 된다. 이 질문 앞에 오래 머물러온 철학자 고병권은, 이렇듯 마르크스를 다시 만나게 하는 물음을 꺼내든다. "마르크스는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자본>을 썼는가?" 대학 제도 밖에서 연구하고 글을 써온 그는 '읽기의 집'에서는 '집사'로, 노들장애인야학에서는 16년 넘게 교사로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마르크스를 다시 소환한 건 단순히 한 사상가를 조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고병권은 말한다. "마르크스의 마음을 바꿔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만든 이들이었다." 여름의 어느 날, 충북 옥천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철학자 고병권씨를 초청한 '마르크스와 자본' 강의가 열렸다. 전국 각지의 마을교육공동체 활동가들이 주최한 자리로,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전 12권, 천년의상상 출판)를 함께 읽어온 모임이 수개월의 공부 끝에 직접 기획했다. "마르크스는 누구를 보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강연은, 단지 한 철학자의 생을 따라가는 것을 넘어, 오늘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마르크스가 만난 결정적 장면들
▲ 카를 마르크스 ⓒ wikipedia commons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있던 인물은 아니다. 독일의 상류 중산층 사회에 속한 그는, 어쩌면 자신의 토대를 지키는 것만으로 평범한 성공을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어떻게 자신의 배경과 전혀 다른 가난한 사람, 노동자의 삶을 진심으로 응시하게 됐을까? 고병권 선생은 이 질문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단순히 "마르크스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품성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환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마르크스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자본>을 썼는가를 보면,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단지 머리로 쓴 게 아니었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을 보면,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세계가 보인다. 어디를 바라보는가, 그 시선은 곧 마음이 가닿은 곳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생각이 따라가고, 결국 철학도 그곳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철학자나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사람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눈길이 가는 대상을 향해 온 마음을 기울였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유를 재편했다. 출발은 그가 '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 기자로 일하던 시절 벌어진 '목재 도벌법' 사건이다. 전통적으로 빈민들이 장작을 주워 쓰던 숲이 갑자기 귀족의 사유재산으로 바뀌면서, 가난한 이들이 법적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 법은 '타락한 법'이었다. "두 종류의 타락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법률을 전혀 준수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다른 하나는 법률에 의해 타락할 때 발생한다. 후자는 약(藥) 자체에서 생겨난 해악이므로 치료할 수가 없다." - 마르크스가 '목재 도벌법' 문제를 지적한 기사에서 인용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중 법이라는 '약' 자체가 독이 되는 상황.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법의 위선과 구조적 폭력의 본질을 목격하게 된다. 두 번째 사건은 1844년, 독일 슐레지엔 지역에서 발생한 직조공 봉기다. 동료 언론인인 아르놀트 루게가 이를 '정치적 지성이 없는 봉기'라 깎아내릴 때, 마르크스는 격렬히 반박한다. "그들은 굶주렸을 뿐 아니라 삶으로부터 배제됐다." 마르크스는 이 봉기를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 아닌, 존재의 문제로 읽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없을 때 고통받는 이들이 일어설 수밖에 없는 당위. '인간'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진짜 정치적 사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언론의 자유'나 '정치적 권리' 따위를 말하고 있을 때, 슐레지엔의 가난한 직조공들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는 자들의 정치'를 발견했다. 그는 선언한다. "혁명에는 선생 노릇이 필요 없다. 운동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그 사태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의 시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내면으로 향한다.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이 국가와 신, 왕, 조국에 퍼붓는 저주를 노래한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시)처럼, 마르크스는 고통받는 자들의 저주가 사회를 깨우는 신호라고 믿었다.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는 프로이센 국가를 "완성된 동물학"이라 불렀다. 타고난 신분이 인간의 권리를 결정짓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 그는 이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食人) 체제"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인식은 '자본'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을 본 철학자
▲ 철학자 고병권씨의 책 ⓒ 월간 옥이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로 본다. <자본> 마지막 장에서 인용한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 - 늑대도 늑대를 잡아먹지 않지만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 처럼 탈인간화된 인간, 비인격화된 삶,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가 특히 주목한 건 '노동력의 상품화'다. 사람 자체를 사고팔 수 없는 근대사회에서, 사람은 대신 자신의 능력을 단위별로, 시간별로 판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용권'을 판매한다. 그런데 이 이용권이 상품이 되는 순간,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 위에 어떤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상품이라는 반항할 수 없는 사물 안에, 자본주의는 사람을 집어넣는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소다. 가축이다. 무두질을 기다리는 가죽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4장에서 노동자가 자본가를 따라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노동자는, 마치 자신의 가죽을 판 뒤 무두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따라간다." 자본주의는 그 가죽을 얼마나 '잘 벗길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굴러간다. 생산성과 효율, 시장과 계약. 겉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그 속은 피비린내 나는 착취의 현장이다. 그는 이 체제의 보편성을, 특정 공장이나 국가가 아니라 '세상의 구조'로 봤다. 고병권은 이 지점을 특히 강조한다. "개별적인 무두질이 전체화된 체계. 그것이 자본주의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사회화된 전제정치'라고 불렀다. 한 개인이 아닌 전체 구조가 사람을 먹고, 말리고, 죽이는 체제. 이 체제를 보았기에, 그는 가난한 이들을 마음에 두고 책을 썼을 테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 가장 어려운 책 마르크스는 가난한 이들을 단지 '관찰'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위해 쓰고, 이들을 믿고, 이들을 독자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지식인이었다. 당대 '대중'은 '무지하거나 폭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곤 했다. 18세기 공화주의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란 바로 이 '위험한 군중'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했다. 콜로세움에서 광분하는 군중, 피를 요구하는 무법적 함성. 그게 당시 대중의 표상이었고, 그래서 엘리트들이 대중을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이 대의제의 전제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상식'을 의심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책 <자본>은 그렇게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을 마음에 품은 마르크스는 이 책을 통해 사유의 무기를 쥐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대 노동자들은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문맹이 태반이었다. 급료 수령서엔 동그라미나 세모를 그려야 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어려운 책인데, 이를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읽히고자 한 마르크스의 신념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마르크스는 진심으로 믿었던 거 같아요. 노동자들도 읽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프랑스어판 '자본' 서문은 이 믿음을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당시 프랑스 출판사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책을 분책하는 데 동의하지만, 첫 장이 지나치게 어렵다는 점을 염려했다. 이 어려운 장을 넘기지 못해 완독을 끝내 포기할까 걱정했던 마르크스는, 프랑스어판 서문에 결국 이런 문장을 넣게 된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가파른 오솔길을 마다하지 않고 기어오르는 자만이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이 말은 학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때와 지금의 노동자들을 향한 마르크스의 절실한 당부다.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달라.' '누구나'를 위한 책이 아니라 '정확히 특정한 누군가'를 겨냥한 책이라는 점에서 <자본>은 당파성이 분명하다. 고병권 선생은 말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진심으로 바랐어요. 이렇게 어렵게 써놓고 노동자 계급이 읽기를 바랐다는 게 어떤 면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무기를 주고 싶어 했어요. 전쟁터로 나가 싸워야 하는 이에게는 가장 잘 벼려진 무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그만큼 <자본>이 어려운 거죠."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매일을 버텨내는 사람들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상정한 이 책의 진짜 독자였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했던 마음. 이토록 어려운 책을 쓰게 만든 건 그들을 향한 깊은 존중과 신뢰였다. 결정적 만남 : 엥겔스 그리고 메리
▲ 철학자 고병권씨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 ⓒ 월간 옥이네 마르크스에겐 '결정적 장면'뿐 아니라 '결정적 만남'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엥겔스와의 만남이다. 당시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집필 중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 인물을 만난다.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이주노동자, 메리 번즈였다. 메리는 엥겔스를 맨체스터 빈민가 '리틀 아일랜드'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마주한 처참한 삶의 풍경은 마르크스에게도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 만남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도시 빈민과 이주노동자의 삶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의 사유는 다시 한번 방향을 튼다. 이제 그는 공장 노동자뿐 아니라 비정규직, 실업자, 이주민, 민족 해방운동가들까지 사상의 중심에 놓기 시작한다. 바깥에 지렛대를 대라 마르크스는 당초 선진 산업국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라 믿었다. 영국 노동자의 처지가 나아지면, 자연스레 아일랜드 등 주변국의 노동자 문제에도 자국 노동자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무관심, 자본의 떡고물에 길든 노동자들의 공모는 그의 신념을 무너뜨렸다. 결국 그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틀렸다. 변화는 아일랜드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는 이제 혁명의 지렛대를 바깥으로, 더 멀리 대야 한다고 믿게 됐다. 이 지점에서 <자본> 1권의 마지막 장이 의미심장하다. 이 장의 주인공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다. 산업예비군, 즉 비정규직과 실업자, 장애인, 도시 빈민 등 '사회 밖'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장 큰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마르크스는 깨달은 것이다. 고병권 선생 역시 말한다. "자본주의는 이제 사람만을 억압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자본에 고용되지 않았더라도, 그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북극곰조차도 그렇다." 마르크스의 마음을 바꾼 사람들
▲ 철학자 고병권씨 ⓒ 월간 옥이네 <자본>은 그래서 '복수'의 책이다. 학문적으로는 어렵고 냉정한 분석서이지만, 마음으로는 노동자의 "침울한 이마"에 월계관을 씌워주고 싶은 철학자의 고백이다. 마르크스는 루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은 이미 하나의 혁명이다." 그것은 단순한 수치심이 아니다. 세상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내면의 각성, 잘못된 세상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변화다. 그것이 만약 한 민족·한 국가·전 지구로 나아간다면, 여러 사람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고병권은 강조한다. "그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혁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단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파헤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하기 때문에 얻는 고통, 또 고통 속에서도 사유하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연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름 없이 착취당한 소년공의 증언, 병든 노동자의 신음, 삶의 바깥에서 떠돌던 이들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그 말에 귀 기울이던 자신을 바꿔냈다. 버나드 쇼는 말했다. "마르크스는 세상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고병권은 되묻는다. "마르크스의 마음을 바꾼 이는 누구인가?" 목재도둑으로 몰린 사람들, 슐레지엔의 직조공들, 맨체스터 빈민가의 이주노동자들, 런던 이스트엔드의 실업자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그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사유하는 인간이 됐고, 그 사유는 세상을 바꾸었다. 그리고 '자본'은 그 사유를 가능케 한 모든 '고통받는 자'를 위한 무기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위해 글을 쓴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의해 마음이 바뀐 사람, 노동자들의 그 침울한 이마를 기억하며 끝내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자본'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지 체제를 이해하려는 공부가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다. 부끄러움을 껴안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변화. 마르크스는 그것을 믿었다. 그 믿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월간옥이네 통권 98호(2025년 8월호)글·사진 박누리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구입하기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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