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20대 중반의 백석. 자료사진
◇모던보이와 기생의 사랑=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구절. 그래,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지. 일상의 남루를 나날이 보듬어야 하는 처지일수록 역설적으로 위로를
릴게임뜻 얻는다.
이 시를 발표할 당시에 백석은 27세였다.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경성(서울)으로 왔을 때였다.
“엄청난 미남이고 모던보이였대요. 그분이 명동 거리를 걸어 다니면 유럽의 한 장면이 옮겨 온 것 같다고….”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백석 시인에 대해 했던 말이다. 서울
손오공릴게임 성북동의 사찰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이었다. 그는 패널들에게 “당시(일제강점기 말엽) 문학계 4대 미남이 누구였는지 아냐”고 물었다. 임화, 윤동주, 황순원과 함께 백석이 ‘F4’로서 여성들의 관심을 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문화 길잡이’ 유 관장은 그 방송에서 1995년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
황금성슬롯 사를 탄생시킨 김영한(1916∼1999) 여사의 일생을 감칠맛 나는 말솜씨로 전했다. 집안이 가난해서 16세에 기생 ‘진향(眞香)’이 된 것, 여창 가곡과 궁중무예에 능해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을 간 것, 후원자였던 독립운동가 신윤국 선생의 옥바라지를 위해 유학 도중 귀국해서 다시 기생이 된 것 등. 특히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며 ‘자야(子夜)’라
바다이야기온라인 는 애칭까지 받았으나 끝내 맺어지지 못한 이야기는 패널들로부터 “가슴이 먹먹하다”는 반응을 이끌었다.
그런데 유 관장은 여기서 확인되지 않은 일부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전했다. 그 하나는, 김영한이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이 넘었던 대원각을 시주하며 “1000억 원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는 것. 이는 출처가 불
신천지릴게임 분명해서 백석 전문 연구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또 하나는, 한국문학사 걸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백석이 자야를 생각하며 쓴 시라고 한 것이다. 유 관장은 패널들에게 ‘나타샤’를 ‘자야’로 바꿔서 읽어보라고까지 했다. 이는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통설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시각들이 더 유력하다. 백석이 청혼을 했다가 집안 반대로 이루지 못한 경남 통영의 여성 박경련이라는 설, 백석에게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육필 원고를 받아 평생 간직했던 소설가 최정희라는 설 등.
책 ‘내 사랑 백석’을 통해 백석과 사랑을 나눴다고 주장한 김영한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 자료사진
◇러브스토리는 조작?= ‘나타샤=자야’라는 설이 퍼진 것은 김영한이 1995년 펴낸 책 ‘내 사랑 백석’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바다’ 등은 백석이 자신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시인)는 “자야 할머니는 나 말고 누가 있겠냐고 말했지만, 남자 마음속은 모른다”고 한 바 있다. 그는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인물인데도 그렇게 말했다.
이동순은 백석 연구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직전인 1987년 ‘백석시전집’을 펴냈고, 이후 수많은 후행 연구가 쏟아졌다.
백석은 해금 전까지 학계에서조차 언급을 금기시했다. 어쩔 수 없이 논해야 할 때는 ‘백○’으로 표기했다. 현대사의 질곡에 갇힌 시인을 꺼내 한국문학사 봉우리에 자리 잡게 만든 것이 ‘백석시전집’이었다. 김영한은 그 책을 본 후 이동순을 만나서 백석과의 인연에 대해 풀어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는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언론인 출신의 작가 홍찬선이 대표적이다. 백석이 살았던 곳을 2년간 답사한 그는 “책 ‘내 사랑 백석’의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라며 그 증거를 댔다. 우선, 김영한은 1936년 신윤국 선생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갔다가 백석을 만났다고 했는데, 신 선생이 투옥된 것은 1942년 10월이었다는 것이다. 1938년 말부터 이듬해 말까지 서울에서 백석과 동거할 때 방정환 등이 집을 찾아왔다고 했으나, 방정환은 1931년에 타계했다. 백석과 그의 지인들이 ‘자야’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 김영한이 백석의 편지와 육필 원고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등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홍찬선은 “백석의 명망에 기대어 기생이었던 자신의 생애를 세탁하려 했다는 것이 제 생각”이라고 했다. 이는 백석 연구가였던 송준 작가의 시각과 유사하다. 송준은 1999년 백석의 부인 리윤희를 접촉해 말년의 백석 사진 2장을 세상에 공개한 바 있다. 우리 문학계는 그 사진을 통해 백석이 양강도 삼수군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1996년 83세로 타계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송준은 김영한이 살아 있을 때 만난 후 “기생인 그녀가, 백석이 유명해지니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관계를 과장한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사랑의 향기를 부정할 수 없다”= 김영한과 깊게 교우했던 이동순은 이런 ‘러브스토리 조작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책 ‘내 사랑 백석’의 연도 오류 지적은 납득합니다만,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자야 여사는 거짓을 꾸며낼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안도현 시인도 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가 지난 2014년 펴낸 ‘백석 평전’은 자신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선배 시인에 대한 아름답고도 충실한 러브레터이다. 안도현은 “김 여사가 오래된 기억을 서술한 것이므로 몇 가지 오류가 있겠으나, 그 사랑 자체를 거짓으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현대사 격랑 속에 바쁘게 살았으니 젊은 시절 연인의 원고 등을 보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헤아렸다.
문학계에서 백석 생애를 천착한 이들은 대체로 김영한의 기억이 과장됐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논문 ‘한국 근대시의 북방(北方)의식 연구’를 쓴 곽효환 시인(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기존 연구의 오류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고 그 사랑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백석과 김영한이 모두 타계한 상황에서 그 진실을 완벽히 복원하긴 힘들 것이다. 모든 연구들을 종합해 가장 설득력 있는 교집합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홍찬선 작가처럼 기존 연구의 아우라를 탈피해 새롭게 보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 다만 여기서 기생이라는 직업을 폄훼하는 선입견을 버렸으면 한다. 기생은 조선시대에 남성의 유희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전통 사회의 ‘화랑도(花郞道)’에서 화도(花道)의 맥을 잇는 존재였다. 단순한 매춘부가 아니라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지닌 전문 직업인이었다.
김영한이 진향이었던 시절부터 시가에 심취했기에 가난한 시인 백석의 존귀함을 알게 됐을 것이다. 그가 노년까지 연인의 시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 덕분에 ‘시인들의 시인’이었던 백석은 대중에게도 사랑받게 됐다. 그가 기금을 출연해 연인 이름으로 만든 백석문학상은 27년째 지속하고 있다.
김영한 여사는 세상을 떠나며 “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에 유독 눈 내리는 날 풍경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선물한 길상사는 종교를 넘어 시민들이 많이 찾는 문화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이번 겨울 눈 내리는 날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
일제미화 시 안쓴 백석‘김일성 찬양시’는 왜?
백석은 북한의 ‘수령’ 김일성과 동갑이다. 1912년 평북 정주 생. 19세에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소설이 당선됐고, 방응모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 후 23세 때부터 서울에서 신문사 교정·출판부 기자로 일하다가 25세 때 첫 시집 ‘사슴’을 출간했다. 5세 연하의 윤동주가 그 책을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되던 해에 고향 정주에서 민족 지도자 조만식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로 일하며 14세 연하의 리윤희와 결혼했다. 네 번째 혼인이었다.
조만식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후 백석은 시를 절필하고, 외국문학 번역과 동시에만 집중한다. 문학이 김일성 체제 홍보에 복속된 상황에서 그걸 피하는 길이라고 여긴 듯하다. 1957년 글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했다가 자아비판을 하고, 두 해 후 ‘삼수갑산’ 오지인 삼수군으로 쫓겨나 양을 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51세이던 1962년 4월 시 ‘조국의 바다여’를 발표했는데, “박정희 군사 퍄쑈 불한당들을 차던지라”는 구절을 담고 있다. 5월에 발표한 동시 ‘나루터’는 김일성의 항일 행적을 기리는 내용이다.
식민 시기에도 일제 찬양시를 쓰지 않았던 그가 이런 것들을 내놓은 이유는 무얼까. 아내와 3남 2녀의 자식들을 위해 복권이 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체제에서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은 그렇게 꺾였다. 그러나 그의 복권 시도는 실패하고, 이후 북한 문학계에서 이름이 사라진다.
이 독한 운명을 백석의 시혼은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1941년 작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장재선 기자